보령 성주사지를 찾아서
대천 근처에서 가 볼만한 곳을 찾다가 성주사지를 찾았다.
성주는 석탄광산으로만 알았지
성주사지는 별로 들어 본 곳이 아니라 일정의 끝에 넣었다.
쌀쌀한 날씨에 해질녘이 되니 더욱 음산했다.
옛날 절터니 너른 공터에 탑 몇 개만 보인다.
관리소에서 자세한 안내를 받았으면 했는데 퇴근시간이 돼서
그냥 사진이라도 찍고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성주사는 신라 말기에 최고의 절로 알려 졌고,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있다.
시간의 여유를 갖고 좀 더 자세히 탐방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득하다.
이곳 성주사는
성주사는 신라 말기에 2,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던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히던 곳이다.
백제 때 오합사라는 절로 지어져 신라 말 낭혜화상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서서히 쇠락해 지금은 절터와 그 위에 남은 몇 가지의 유물들만이
이곳이 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서
금당터 뒤쪽 석탑 3기(동쪽엔 동삼층탑, 서쪽엔 서삼층탑이라 한다.)
동삼층탑
성주사지 석탑
성주사지에 신라 말에 건립한 4기의 석탑이 있다.
오층석탑과 중앙삼층석탑, 조각 수법이 뛰어난 서삼층석탑, 동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성주사의 규모가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는 1,000여 칸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산파의 총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 절에서 한때 2천 5백 명가량의 승려들이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하여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때는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나 흘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절은 간 데 없고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성주사지 석등(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통일신라시대의 6.6m의 석탑인데 석탑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 각 부분에서 변형을 보이면서 고려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단다.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彗和尙白月寶光塔碑)
신라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산문을 처음으로 창설한 낭혜 화상 무염(無染)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무염(801-888)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이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최인연이 글을 썼다.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彗和尙白月寶光塔碑) 사진 연합뉴스에서
성주사지 석계단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금당에 오르는 계단이다. 양쪽의 사자상의 조각 수법이 뛰어난 것이란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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